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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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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호식  |  출판사 : 예랑
발행일 : 2021-07-01  |  (150*220)mm 288p  |  978-89-8813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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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눈물은, 삶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할 믿음이 말로만 끝나고 관념으로만 제쳐놓은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을 향한 절규요 통곡이다. 인간성은 죽고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여하는 자를 만드시겠다는 당신의 뜻에 반(反)하여, 더럽고 추한 나의 이 인간성을 개조해 나가야한다는 모든 인본주의적 예수와,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열심과 충성의 행위를 걸쳐놓은 모든 율법적 예수, 그리고 세기말적인 윤리 도덕의 타락 현상을 성경을 빌어 질타하고 있는 모든 윤리, 도덕적인 예수를 향한 통분과 아픔의 눈물이다. <본문 中에서>

이 책은 30년 만에 재발행되는 책이다. 이 도서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의 성원과 요청이 큰 역할을 했다. 다종교 한국 사회에 기독교인들이 차지하는 비율도 적지 않지만,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갈수록 곱지 않다. 철저한 성찰을 필요로 하고 그 근본에는 성서에 대한 오해를 기반으로 기독교가 형성되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책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예수의 눈물'은 당시 유대교나 그를 지근거리에서 따르던 이들을 향한 눈물이었다. 예수의 눈물은 오늘 기독교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하다는 점이다. 예수의 시선에서 성서가 다시 읽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을 기본으로 분석한 후 글쓰기를 하고 있다.

성서는 인류의 위대한 정신의 유산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거기에는 예수의 정신이 있고 예수의 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예수의 시선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예수의 시선에서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눈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책은 예수의 시선으로 성서의 다양한 주제들을 살피고 있다. 예수의 눈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의 시선을 회복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분명 독자들과 새로운 만남을 이루게 할 것이다. 갈등하는 종교인들에게 큰 길잡이가 되고 힌트가 될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 역시 기독교의 교주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 인류와 온 우주의 하나님이다. 결코 어떤 한 종파의 교주일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는 없어질 수 있어도 하나님은 없어질 수 없으며, 기독교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벧전4:17) 성경은 그럴 수 없으며, 오히려 세상과 기독교를 심판하는 주체다(요12:48). 아무리 기독교일지라도 그 기독교적 시각이,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치 않는다면 - 어폐가 있지만 행간을 읽으시기 바란다 - 그것은 오히려 악한 눈이요 어두움일 뿐이다.
<18 쪽>

왜 사람들이 영생을 원하면서도 영생의 주체인 말씀 앞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가. 그 이유가 곧 모세의 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성경을 곁에 두고 밤이나 낮이나 보고 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바라보니 온통 ‘해야 할 일’ 뿐이었던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보자. 어떻게 그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일 수 있는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러한 계명들을 육신적으로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고, 그런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6 쪽>

그러면 그 ‘말’이 어떻게 바뀌는가. 악한 말에서 선한 말로, 육적인 말에서 영적인 말로,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바뀐다. 또한 ‘나는 구원 받았다’에서 ‘나는 구원받을 필요도 가치도 없습니다.’로 바뀐다. ‘천국 가야 된다’에서 ‘지옥 가도 좋습니다.’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믿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구원 받았고 따라서 천국 가야 된다’는 사람이 천국 가게 되면 이것은 은혜도 선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의 ‘믿음이라는 행위’에 대한 삯이요 대가에 불과한 것이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너 죽어라(지옥가라)’고 해도 한마디 이의 신청 없이 ‘예’하고 가는 사람이다.
<39 쪽>

유대인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를 믿고 싶었지만 (왜냐하면 예수를 임금으로 모시려고 쫓아 다녔으니까) 그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예수를 떠나갔던 것인데,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다만 예수를 자기의 임금 삼으려고 쫓아다니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것도 떡을 먹고 배불러서 쫓아갔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이유들을 가지고…. 그래서 예수를 만나면 어쩔 것인가. 유대인들처럼 예수의 ‘예수됨’에 실망해서 이 말씀은 어렵다고 예수에게 핑계를 대고 예수를 떠날 것이며, 마침내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할 것이다.
<44-45 쪽>

사랑의 외적인 표현은 ‘이것이다’라고 정형화(定型化)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정형을 가지게 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형화(定型化) 된 행위가 사랑을 내쫓게 된다. 그러면서 그러한 행위들이 사랑의 표현인양 자리 잡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정형(定型)은 무정형(無定型)이어야한다. 정형에서는 사랑이 살 수 없다. 정형은 의무며, 윤리며, 도리며, 행위기 때문이다. 정형은 꽉 짜인 틀이어서 획일화 된 결론만 강요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은 어버이날이 되면 카네이션 한 송이로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카네이션’을 선택하는 이유란 별것이 아니다. 오직 다른 모든 사람들이 카네이션을 자기들 사랑의 표현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며 시중의 모든 꽃가게가 의당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것으로 정형화 해 놓았기 때문이다.
<56 쪽>

왜 우리는 손으로 지은 하나님의 성전을 갖지 못해 아우성인가. 왜 우리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장터 건물 하나 세내어 입주시키지 아니하면 거처할 곳이 없는 무일푼으로 만드는가. 더더구나 한심한 것은 우리가 집짓고 사는 이 땅을 누가 만든 것이며, 그래서 그것이 누구의 것인 줄 빤히 아는 우리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땅 한 평을 ‘헌금’한다고 작정하고 기도하고 충성하는가. 그 땅은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발등상이 아니던가. 그 발등상을 파헤치고 거기다 콘크리트 섞어 부어, 기어이 바벨탑을 쌓아 올려야만 속이 시원할 것인가.
<67 쪽>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의 ‘세상’이다. 이점을 간과하면 성경의 모든 지적은 허공에 뜰 수밖에 없다. 즉 성경은 성경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과 책망인데, 하나님을 믿어 성경을 보게 되었다고 성경이 지적하는 ‘세상’이라는 대상에서 자기는 빠져 나왔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은 늘 허공에다 외치는 모양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향한 발언이다. 본문의 지적처럼 하나님을 ‘존경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때로는 믿지 않는다고 책망도 하고, 때로는 헛되이 섬긴다고 꾸짖기도 하는 것이다.
<77 쪽>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인간적 겸손의 가면을 쓰고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못 박고 있다. 인격적인 겸손에 신경 쓰지 말라는 부탁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 믿으면 겸손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가. 또 성령의 열매로서 겸손이 얼마나 강조되어 왔는가. 사실 이런 겸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를 믿건 석가모니를 믿건 누구나 가지고 있다.
<92 쪽>

예수를 왕의 자리로 보내자. 빼앗긴 그의 왕권을 돌려드리자. 이것은 결코 한마디의 구호일 수 없다.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용서를 구하지 말고 그의 사약(賜藥)을 바라자. 그 길만이 우리의 죗값을 치르는 길이요, 아울러 그 길만이 우리의 삶의 길이다. 설령 다시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왕으로 모신 줄 알았는데 종으로 부려먹고 있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죽어 마땅하니까.
<102 쪽>

예수의 눈물은, 삶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할 믿음이 말로만 끝나고 관념으로만 제쳐놓은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을 향한 절규요 통곡이다. 인간성은 죽고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여하는 자를 만드시겠다는 당신의 뜻에 반(反)하여, 더럽고 추한 나의 이 인간성을 개조해 나가야 한다는 모든 인본주의적 예수와,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열심과 충성의 행위를 걸쳐놓은 모든 율법적 예수, 그리고 세기말적인 윤리 도덕의 타락 현상을 성경을 빌어 질타하고 있는 모든 윤리, 도덕적인 예수를 향한 통분과 아픔의 눈물이다.
<109 쪽>

믿음을 더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이 없다고 통회자복하고(눅18:13) 있는가. 믿음이라는 것을, 부족할 수도 있고 충만할 수도 있는 양적(量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작은 것이지만 그 속에 씨와 그 씨를 자라게 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겨자씨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은 믿음을 양적인 것으로 생각한 그 생각의 결과다.
<121 쪽>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지금도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지 절대로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것일 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아무리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수24:19) 목이 아프게 외쳐도 그건 성경말씀이고 나의 삶은 굳세게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우리들이다(수24:21). 왜냐하면 그렇게 섬기는 것이 신앙인 줄로 믿기 때문이다.
<129 쪽>

성경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연극
예수도 있고
대제사장도 있고
바리새인 서기관 레위인 모두 있는데
간음한 여자만 없다.

막이 내릴 시간은 다 왔는데
여전히
간음한 여자만 없다
어디서
누구를 데려다가
이 연극의 끝을 채울꼬.
<142-143 쪽>

자기 목숨을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사는 삶이 주는 평안이 있는데 이것이 곧 세상이 주는 평안이요,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는 평안이 있는데 이것이 곧 예수의 평안이다. 둘 다 평안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전자는 자기 목숨 이외의 것이 보이지 않음으로 평안이요 후자는 자기 목숨이 없어지고(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 갈2:20)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주어지는 평안이다. 근심이 있고 갈등이 있다는 얘기는 자기 목숨과 그리스도의 생명 사이에 방황한다는 말이다. 몸으로는 자기 목숨을 위하여 살면서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다.
<151 쪽>

그러면 재리의 유혹은 무엇인가.
재리는 부(富)요, 유혹은 ‘속이다, 꾀다’의 명사형인데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간단히 말한다면 ‘돈이 있어야’다. 돈 때문에 할 말을 못하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는 것도 재리의 유혹에 해당하겠으나 이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즉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돈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재리의 유혹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유혹(속임, 꾐)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돈으로’ 일하시는 게 아니다. 당신의 약속에 따라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이 직접 일 하시는데 괜히 돈을 좋아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일 한답시고 ‘돈도’ 있어야 됨을 주장한다. 즉 말씀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란 말이다(딤전6:5). 말씀을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거기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161 쪽>

예수께서는 수많은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니까 ‘이렇게 하라’고 처방전을 떼어주신다. 이 처방전이 그 날을 피할 수 있는 열쇠다. 34절, 대문자로 시작하는 이 문장의 첫 단어는 조심하라(프로세케테)다.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 4장 13절의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할 때의 착념(着念)의 개념이다. 골똘히 그것을 생각하고 관심을 두고 그렇게 산다는 의미다. 그러면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에 착념(着念)하라는 말씀인가.
<169 쪽>

인간 탐심의 산물인 문명은 하나님과 어울려 살도록 되어 있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대한 성(城)을 쌓아온 셈이다. 전화라는 것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인데 사람들은 자기들끼리의 신속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전화를 가설할 줄 알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한 전화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181 쪽>

버려야 할 ‘자기 것’은 집이나 아내나 자녀가 아니다. 분명히 주님은 집이나 아내나 자녀 등을 버린 자는 금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겠고 내세에서도 영생을 소유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집이나 아내나 자녀 등이 ‘자기 것’인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집이나 아내가 자기에게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냐에 문제가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이, 그리고 거기서 나온 모든 재물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 사람이 자기 땅이라고 등기부 등본 들이대며 말뚝 쳐서 지어놓은 집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하물며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아내의 생명은 누구 것이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자녀들은 과연 누구 것인가.
<189 쪽>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하게 되었을 때 이들이 모두 가나안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지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것과 같이 신나고 화끈하며 가슴 뭉클한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서 홍해 해변에 천막치고 앉아 먹고 마시고 놀고 있는 것이다.
<202 쪽>

잘못 배달된 연애편지를 붙잡고 황홀지경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이럴 때 느끼는 고통은 과연 저 황홀한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나중에 남가일몽으로 밝혀지건 말건 그때까지나 행복하도록 수수방관하고 자기 할 일이나 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참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7 쪽>

우리는 선악의 세계를 떠나 생명의 세계로 가야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선악의 세계를 일컫는 동의어다. 생명의 세계에는 선악적인 기준이 없다. 다만 생명의 원리만 있을 뿐이다. 악에 대립되고 대칭적인 선이 아니라 생명의 다른 표현 양식으로 존재하는 선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이다. 선행은 생명의 발산이다. 발산하라고 준 생명을 꼬깃꼬깃 접어서 품속에 집어넣고 혹시 없어질세라 혹시 빼앗길세라 안절부절 못하고 사는 인생이 오늘의 우리 아닌가.
<229 쪽>

우리는 우리 눈의 이 들보를 빼야한다(마7:3).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생명의 반석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그 생명의 반석을 부딪치는 돌로밖에 보지 못하는 들보 섞인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자랑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작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면서 장차 우리가 받아 누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만 광분하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그리스도를 제쳐놓는 이율배반이다.
<239 쪽>

은혜라는 것은 죽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은혜가 없는 것은 바로 이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죄는 자기가 짓고, 죽기는 예수가 죽는다는, 꼭 일확천금을 꿈꾸는 ‘복부인’같은 심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수는 나를 대신해서 죽어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이 땅에 나신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 갈 것은 ‘나를 대신해서’다. 대신 죽는다는 것은 죽을 짓을 한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짓을 하지 않은 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그 하나는 예수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했으므로, 과연 내가 죽을만한 죄를 지은 본문의 강도 같은 인간인가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면 예수는 죽을 짓을 하지 않은 즉 자기의 죄로는 사형에 합당한 죄인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244 쪽>

정작 죄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궁핍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궁핍을 무슨 팔자인 줄 알고 살아가는 데 있다. 즉 체면 때문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분이 간혹 한둘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을 한 유대인들 모두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의 풍요보다 애굽의 궁핍(실제로는 풍요)에 더 익숙한 삶을 살았다는 게 성경의 지적이다.
<258 쪽>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와 같으니(고전15:48),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15:50), 흙에 속한 자, 혈육으로서는 하늘에 속한 것들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예수가 ‘누룩!’ 말씀하시자 흙에 속한 제자들은 ‘떡!’ 했던 것이다.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제자들을 당신의 열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를 만드셨지만 본문의 상황 속에서는 분명히 흙에 속한 자들이다.
<270 쪽>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결국 자기의 타인화(他人化)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요, 자기의 객관화(客觀化), 즉 자기가 별개의 제3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관화 되어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자기 계획으로 금식기도를 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고’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아직도 육신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땅엣 것에 매달리는 사람이다.
믿음이란 인본적(人本的) 진심이 아니요 신본적(神本的) 삶이다. 혈육적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알려주심(아포칼루프토, 계시. 마16:17)이다. 이것을 유일한 기쁨의 원천으로 삼고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사람이 곧 복 있는 사람이다(시1:2). 큰일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곧 복이요 믿음이다.
<281-282 쪽>
머리말

1. 성경의 기독교인가 기독교의 성경인가 / 11
2. 그의 글과 나의 말 / 21
3.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 31
4. 이 말씀은 어렵도다 / 41
5. 가지고 지키는 자 / 53
6. 종교 행위의 본질 / 65
7. 입술과 마음 / 75
8. 몸과 그림자 / 85
9. 임금과 종의 차이 / 95
10. 예수의 눈물 / 103
11. 믿음을 더하소서 / 113
12. 받들지 않는 자 / 123
13. 세상과 너희 그리고 나 / 133
14. 예수의 평안과 세상의 평안 / 145
15.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 155
16. 스스로 조심하라 / 165
17. 어리석은 부자 / 175
18. 무엇이 우리의 것인가 / 185
19. 깨끗함과 구원 / 195
20. 용서할 것인가 용서 받을 것인가 / 205
21. 선과 악의 기준 / 219
22.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231
23. 한편 강도 / 241
24. 연약이라는 이름의 불신 / 251
25. 어찌하여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 깨닫지 못하느냐 / 263
26.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 273
성구 찾아보기 / 283
이호식
저자는 잘나가던 한국은행 근무를 뒤로하고 30대 초반에 퇴직한 후 이 책을 썼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20대와 30대, 치열한 종교 열병의 시간들이 있었고, 기독교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던 것에서 벗어나 성서의 시각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며 글쓰기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의 다른 책
- 월간 말씀 안으로
- 믿음과 믿는다는 것
- 떡과 포도주
- 창세기 산책
- 어느 바리새인의 고백
- 도마복음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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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예수의 눈물
저자이호식
출판사예랑
크기(150*220)mm
쪽수288
제품구성상품설명 참조
출간일2021-07-01
목차 또는 책소개상품설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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